"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뒤짚어 엎을 수도 있다" '올해의 사자성어'로 돌아본 '박근혜의 4년'

'무미랑 전기'(武媚娘 傳奇)라는 중국 TV드라마가 있다. 중국 여배우 판빙빙이 제작비를 대고 주연을 맡은 94부작 대하 드라마다. 화려한 의상과 궁중 암투 등 볼거리가 풍부하다. 후난TV에서 2014년 12월부터 방송을 시작했고 우리나라 케이블 채널에서도 볼 수 있다.

여기서 무미랑(武媚娘)은 '무씨 성을 가진 아름다운 여자'라는 뜻이다. 무씨 성을 가진 아름다운 여자, 무미랑은 그럼 누구인가. 5천년 넘는 중국 역사상 여자의 몸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단 한 명의 여인, 측천무후(則天武后) 또는 무측천(武則天)이다.

 

측천무후의 일대기를 다룬 판빙빙 제작, 주연 대하 TV 드라마 '무미랑 전기'.

무측천의 원래 이름은 '무조'(武曌)로 624년 당 고조 이연이 당나라를 창업하던 해에 태어났다. 무조는 어려서부터 탁월한 미모로 이름을 떨친다. '정관의 치'로 유명한 당 2대 황제 태종은 그녀를 궁에 들여 조서를 내리고 정5품 후궁 재인()으로 삼는다.

이때 그녀 나이 불과 열 넷.

태종은 '꽃과 옥같이 어여쁘다'며 무조에게 '예쁜 여자 애'라는 뜻의 이름 '미랑'을 주고 총애한다. 하지만 아름다움과 재주가 지나쳐 시기를 받았는지, 태종의 흥미가 다했는지, 무미랑은 이윽고 황제의 총애를 잃는다.

후궁에게 황제의 발길이 끊어졌음은 권력으로든 여인으로든 '궁중의 삶'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통상의 경우는 그렇다. 하지만 무미랑은 달랐다. 곧 새로운 밀회의 발길을 만들어 낸다. 새로운 발걸음의 주인공은 '이치'라는 이름을 가진 태종의 아들, 당 제국의 황태자이다.

649년 5월 16일 당 태종이 죽는다. 그의 모든 후궁들은 관례와 태종의 유언에 따라 '감업사'라는 절로 들어가 비구니가 된다. 세상과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태종이 죽고 이틀 뒤 이치는 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다. 당 제국 3대 황제 고종이다. 천하의 주인인 황제가 됐음에도 고종은 4살 연상 무미랑을 잊지 못한다. 고종은 무미랑을 환속시켜 다시 궁에 들이고 정2품 소의(昭儀)에 봉한다.

피를 나눈 모자 관계는 아니라 해도 아버지에 이어 그 아들까지 사랑하게 된 여인, 혹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든 여인.

당 초기만 해도 아버지가 죽으면 그 큰아들이 아버지의 여인들을 수습해 거느리던 북방의 풍습이 남아 있었다 해도, 고종의 총애를 바탕으로 조정을 장악해 가던 '소 숙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왕 황후'가 고종과 무미랑의 밀회를, 궁 안에 들이는 것까지도 묵인·방조했다 해도,

상대는 천하의 주인인 황제다. 미녀라면 황궁 안에 차고 넘쳤을 것이다. 무미랑의 어떤 '특별한' 아름다움과 재주가 아니면 2대에 걸쳐 황제의 총애를 받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미랑이 움켜쥐려던 것은 단순히 황제의 '총애'가 아니었다. '권력'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소의 무미랑은 소 숙비는 물론 왕 황후 세력마저 잡아 먹는다. 죽이거나 폐위시킨 것이다.

이 과정에 소 숙비가 "내 죽어 귀신이 돼도 반드시 너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는 저주를 하자 무미랑은 "어디 팔다리 없고 머리도 없는 술 취한 귀신이 나를 찾아올 수 있나 보자"며  숙비의 팔다리와 목을 다 잘라내 술통에 담아 버린다.

이렇듯 냉혹한 정적 제거를 통해 655년 11월 무미랑은 황후의 자리에 오른다. 권력의 상징인 황후의 계관을 쓰고 고종과 나란히 앉아 조정의 대권을 장악하니, 무후(武后)의 탄생이다.

태종이 죽고 감업사에 유폐된지 6년 만, 태종의 후궁으로 궁에 들어온 14살로 거슬러 올라가면 18년 만이니 그녀 나이 서른 둘이다. 이후 50년간 무후는 당나라를 그녀의 치마폭에 두고 말 그대로 쥐락펴락한다.

두 아들을 차례로 황제에 등극시키니 중종과 예종이다. 무후는 황후에서 태후가 된다. 이윽고는 두 아들마저 차례로 황제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마침내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690년 9월 9일 무측천은 낙양을 수도로 삼고 연호를 천수(天授)로 하여 당나라를 주나라로 바꾼다. 황태자로 강등된 예종에겐 이씨 성 대신 자신의 성인 무씨 성을 내린다. 이씨 천하에서 바야흐로 무씨 천하가 된 것이다.

 

정적에겐 한없이 냉혹했던 무측천이었지만 그녀의 치세 동안 당 제국은, 주 나라는 번영일로를 걷는다. 과거제도를 대대적으로 정비해 천하의 인재들을 모았고 당시 국력의 기준이던 인구는 652년 380만호에서 705년 615만호로 크게 늘었다.

사회는 안정되고 경제는 활기를 띠었고 제국의 영토는 태종 때보다 더 넓어졌다.

그럼에도 후세 사가들의 무측천에 대한 평가는 박하거나 악의적이었다. 신당서(新唐書)는 ‘무측천이 악행을 일삼고도 도륙을 당하지 않은 것은 오로지 요행이다. 음란한 짓거리를 내놓고 하면서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중국 근대의 대표적 문학가인 임어당은 무후를 ‘중국 역사상 가장 교만하고 음탕하고 허영되고 고집만 센 잔인한 살인마’라고 비난했다. 이렇듯 그녀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희대의 요녀 또는 악녀, 잘 봐줘야 철녀다.

그녀가 중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처다부제를 선포하고 그 자신 여러 남자들을 거느리기도 했고 향락도 일삼았고 정적을 제거하는 데 잔인했음을 감안해도 그녀에 대한 평가가 박하기는 마찬가지다.

정도의 차이일뿐, 어느 황제가 그렇지 않았겠는가.

당장 당 태종 이세민부터 피를 나눈 형과 아우를 죽이고 황위에 올랐다. 현종은 말년에 양귀비를 끼고 정사를 어지렵혔지만 태종과 현종은 각각 '정관의 치', '개원의 치'라며 손꼽히는 성군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녀에 대한 야박한 평가는 그녀가 여자였기 때문이다.

역사가 그녀를 어떻게 기록할지 무엇보다 그녀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이런저런 정치적 상황이 있었지만 어쨌든 죽기 얼마전 그녀는 아들 중종에게 다시 황위를 양도하고 물러 앉는다.

그리고 705년 11월 26일 무측천은 "내가 죽으면 고종 옆에 묻되 황제 칭호를 없애고 황후로 부르도록 하라. 내 비석엔 아무 것도 새기지 말라"는 유지를 남기고 숨을 거둔다. 향년 81세였다.

그녀는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라는 시호를 받고 고종과 나란히 묻힌다. 그녀의 비석엔 그녀의 유지대로 한 글자도 새겨지지 않으니 무자비(無字碑)다. 당은 다시 이씨 성을 가진 황제가 다스리니 세상은 다시 이씨 천하가 된다.

살아서 황위를 양위했기에, 죽어서 황제가 아닌 황후로, 태후로 남았기에, 주나라에서 다시 당나라로 돌려 놓았기에 측천무후로 그녀의 이름이 그나마 보존될 수 있었을 것이다. 

무후를 부정하게 되면 그녀가 직접 겪은 태종, 고종, 중종, 예종, 이후로도 이어지는 당 황제들의 정통성이 부정되게 되는 점을 그녀는 아마도 알고 그랬을 것이다. 

아니면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떠나는 마당에 진심으로 고종을 사랑했던 그저 한 사람의 여자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죽기 직전 그녀는 자신이 황제에 오르면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 의식을 거행했던 숭산에 태감 호초를 보내 삼관구부(三官九府)의 신과 신선들에게 '자신이 지은 모든 죄를 사하여 달라'는 의식을 올리고 속죄문을 새긴 금간(金簡)을 숭산에 던진다.

천자로 천하를 소유했던 무측천도 막상 하늘로 돌아갈 때가 되니 하늘이 두려웠던 것일까. 

     

무측천 초상 전신. 출처: 중국역대인물 초상화

무측천이 그토록 움켜쥐려 했던 천하.

권력을 틀어쥐고 천하를 가졌지만, 그녀가 가진 것이 천하였기에, 움켜쥔 자리가 천자였기에, 더구나 여자의 몸이었기에 무측천은 여자의 몸으로 '하늘의 아들'이 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고금의 경전을 뒤진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대방등무상대운경'(大方等無想大雲經)이라는 불경이다. 대운경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정광(淨光)이라는 천녀(天女)가 있다. 부처님이 이르기를 중생을 위해 여자의 몸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때 신하들은 이 여인을 받들어 왕위를 이어갈 것이고 천하를 다스릴 것이다. 인간 세계의 모든 나라가 받들 것이고 저항하는 자가 없을 것이다.'

천자의 자리에 오른 명분, 하늘의 명, 천명(天命)이 필요했고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이를 널리 퍼뜨린다. 이렇듯 천명은 중국 황제관의 근원이자 밑바탕이다.

무후가 연호를 천수(天授), '하늘이 주었다'고 지은 것만 봐도 천명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일단 천명을 받은 이상, 천자가 된 이상 '짐은 곧 하늘'이 된다.

천명을 받은 존재, 하늘의 아들이기에 천자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 오류가 없으니 잘못이 있을 수도 없다. 하늘의 아들에게 어찌 오류가, 잘못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음란한 짓거리를 내놓고 하면서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신당서가 전하는 그녀에 대한 평가는 중국식 천자관의 반증이기도 하다. 천자가 일을 행함에 거리낌이 있을 수 없다. 수치나 부끄러움은 더더욱 없다. 천자의 행사는 그 자체가 하늘의 행사다. 수치나 부끄러움은 사람의 몫이지 하늘의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녀가 무슨 짓을 하든, 사람을 오체분시해 죽이든, 수만 수십만이 죽어나갈 전쟁을 손가락 하나로 명하든, 남창을 두고 벌건 대낮에 집단 방사를 벌이든 아무런 거리낌도 수치도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었을 것이다. 

천명을 받은 한, 그 천명이 다하지 않은 한 천자는 그런 자리다.

중종의 부인인 위황후와 그녀의 딸 안락공주는 "나라고 시어머니처럼, 할머니처럼,  무측천이 되지 못할 일이 무엇이냐"며 남편이자 아버지 중종을 독살까지 해가며 정권을 잡아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진 않았다.

권력의지가 있다고 해서, 독하다고 해서, 세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잡을 수는 없는 자리, 천자는 천명은 그런 것이기도 하다.

 

측천무후를 묘사한 그림(왼쪽)과 한 글자도 새겨져 있지 않은 측천무후의 비석 '무자비'.

이런 중국식 천자관을 가진 나라가 21세기에도 있다. 우리나라랑 가까이 있다. 북한이다. 이른바 '혁명적 수령론'이다.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은 수령을 "근로인민대중의 최고 뇌수이며 통일단결의 중심"이라고 정의했다. 북한은 수령을 단순한 지배자가 아닌 절대적인 존재, 신적인 존재로까지 추켜 올린다.

신에게 오류나 잘못이 있을 수 없다. 당연히 수령이 지도하고 이끄는 당도 오류가 있을 수 없다. 당이 모든 걸 결정함에도 북한이 굳이 당과 내각을 따로 두는 배경이다.

당도 수령도 오류가 있으면 안되니 일이 잘못됐을 때 오류와 잘못을 돌릴 대상이 필요하다. 한마디로 잘되면 수령님 덕, 못되면 수령과 당의 지도를 제대로 따르지 못한 내각과 인민대중 잘못이라는 거다. 일상적인 숙청과 공포정치는 이 바탕에서 이뤄진다.

이 지점에서 수령과 국가는 동일시 되고 일체화 된다.

비슷한 사람이 서양에도 있었다. '짐이 곧 국가다'라는 말로 유명한 '태양왕'이라 불렸던 프랑스 루이14세다. 

'피와 살을 가진 신'. 왕 자리는 하늘이 내린다는 '왕권신수설'에 따라 절대군주는 '피와 살을 가진 신'의 존재가 된다.

중국의 천자, 북한의 수령, 유럽의 절대군주. 이들을 관통하는 것은 바로 천자는, 수령은, 왕은 '하늘의 존재'니 오류도 잘못도 있을 수 없다는 거다. 신이 무슨 잘못을 하겠는가. 무슨 짓을 해도 '신의 뜻'이 되어버리는데.

무언가 심하게 잘못된 것 같아도, 이건 아닌 것 같아도, 그렇게 의심하는 순간 그 신민들은 '신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무지하거나 불경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천자가 천하를 다스리던 고대 중국도 아니고 피와 살을 가진 신이 나라를 지배하던 몇 백년 전 유럽도 아니고 여기는 수령이 인민을 지도하는 북한은 더더욱 아니다.

당대 최고의 권력을 움켜쥐었다 해도, 그 권세로 천하를 쥐락펴락했다 해도 '대통령 박근혜'가 측천무후가 아님도 마찬가지다.

여기는 지금은 21세기 민주 그것도 공화국 대한민국이다.

 

루이 14세 초상화, 이아생트 리고 작, 1701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21일 검찰에 소환돼 강도높은 조사를 받고 귀가했다. 검찰청사에 머문 시간은 무려 21시간 29분. 검찰 조사를 받은 전직 대통령들 가운데 최장 시간 조사 기록이다. 

박 대통령이 받는 혐의는 삼성으로부터 뇌물수수와 직권남용, 강요, 공무상 비밀누설 등 13개다. 조사 결과에 따라 SK나 롯데 관련 뇌물 등 혐의가 더 늘어날 수도 있다.

박 전 대통령은 전체적으로 혐의를 모두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 신문조서를 꼼꼼하게 검토하고 '이게 이런 뜻이 아니다'며 수정하는 데 7시간 넘게 썼다.

검찰 관계자가 박 전 대통령의 그 '꼼꼼함'에 혀를 내둘렀다는 후문이다. 시중에선 '세월호 7시간'에 빗대 '세월호도 그렇게 좀 꼼꼼하게 대처하지 그랬냐'는 냉소와 힐난이 난무하고 있다.

'무죄 추정의 원칙'이 형법상 대원칙이니 '피의자 박근혜'가 본인의 권리를 위해, 구속을 피하기 위해 재판에서 무죄를 받기 위해 꼼꼼하게 조서를 검토하고 고친 것을 뭐라 할 수는 없다. 

다만 한 가지가 궁금할 따름이다. 삼성쯤 되는 재벌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SK가, 롯데가 최순실의 뭐를 보고 수십억, 수백억씩 줬겠는가.

'대통령 박근혜'와 '대통령과 최순실의 친분'을 빼면 얘기가 될 수 없다. 상식으론 그렇다.

그럼에도 박 전 대통령은 현직에 있으면서 받겠다던 검찰 수사도 안 받고, 특검 수사도 안 받고 그 무슨 인터넷TV에 나와 "엮어도 너무 엮은 것"이라며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헌법재판소 재판관 8명의 만장일치로 대통령직에서 파면 당해 청와대를 나와 삼성동 사저로 복귀하면서는 전 청와대 대변인이었던 민경욱 의원을 통해 "진실은 반드시 밝혀질 것"이라 했다.

한마디로 엮여서 억울하다는거다. 

그리고 사저 밖으로 안 나오며 두문불출하는 와중에 세월호 때도 그렇게 논란이 됐던 그 '올림머리' 하는 미용사 자매를 연일 삼성동 사저로 부르는 건 왜 그런 건지도 가외로 궁금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지난 21일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고 있다. 이날도 박 전 대통령은 미용사 자매를 사저로 불러 '올림머리'를 하고 검찰에 나왔다. /김준호 기자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이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는 경향을 말한다.

쉽게 얘기하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을 말한다.

헌법재판관 전원이 "박 전 대통령의 헌법 수호 의지가 드러나지 않는다. 대통령을 파면해서 얻는 헌법적 이익이 압도적으로 크다"며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을 파면했다. 

헌법재판관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표준적으로 서울대 법대를 나온 50~60대 남성이다. 평생 판사나 검사로 법을 다뤄온 사람들이다. 성향 차는 있다 해도 기본적으로 이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사람들이다. 

그런 헌재 재판관들이 만장일치로, 대한민국에서 보수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대검 공안부장 출신 안창호 재판관의 경우엔 소수 의견을 따로 내 "이번 사안은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 헌법에 대한 것이다"라며 박 대통령을 파면했다. 

그럼에도 박 전 대통령은 "시간이 걸려도 진실은 언젠가 반드시 밝혀질 것이라고 믿는다"는 멘탈리티를 보여준다.

박 전 대통령 지지자들은 헌재의 8:0 탄핵 인용을 두고 "8:0이 웬 말이냐. 인민재판이냐"고 반발한다. 헌재 재판관들조차 '빨갱이'로 만들어 버리는 그 '기상천외함'엔 그저 아연실색할 따름이다. 6:2 혹은 7:1이 나왔다면 "진실은 소수에 있다"며 또 반발했을 것이다.

전형적인 확증 편향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조사와 구속영장 청구 여부를 다룬 지난 22일 법률방송뉴스 화면. 왼쪽은 박 전 대통령이 22일 오전 조사를 마치고 서울중앙지검 청사를 나서는 모습, 오른쪽은 삼성동 사저에 도착해 지지자들을 향해 웃음을 보이는 모습이다. 표정이 대조적이다. /김준호 기자

박 전 대통령을 조사한 검찰은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여부를 두고 고심하고 있다. 검찰 특수본 관계자는 "법과 원칙에 맞게 판단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탄핵이라는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은 박 전 대통령을 꼭 구속까지 해서 사회갈등을 더 심화시킬 필요가 있냐는 '상황론'도 있지만, 검찰이 '법과 원칙'을 강조함에 따라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쪽에 무게가 실리는 분위기다.

이재용 부회장을 비롯해 관련자들이 이미 다 구속됐는데 이번 국정농단 사태의 정점에 있는 박 전 대통령을 구속하지 않는 것은 형평성에도 원칙에도 맞지 않는다는 논리다.         

이에 따라 박 전 대통령이 구속돼 구치소에 수감될지가 초미의 관심이다.

더불어 박 전 대통령이 기소돼 재판에 넘겨진다면 유죄가 나올지, 유죄가 나온다면 징역형 실형이 나올지, 징역형이 나온다면 몇 년이나 나올지 등도 세인들의 구설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리고 또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는 게 있다.

박 전 대통령이 검찰 수사를 받고 나온 다음날인 23일, 공교롭게도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사태의 단초가 된, 국회 탄핵소추의결서에도 적시된 '세월호'가 수면 위로 모습을 나타냈다.

가라앉은 지 1천73일 만이다.

수면 위로 드러난 세월호 모습은 긁히고 녹슬어 처참하다. 유가족들의 오열이 다시 포개졌다. 이것도 우연인가. 세월호 노란 리본을 꼭 닮은 주황빛 '세월호 구름'이 하늘에 떴다고 한다.

 

세월호가 1천73일 만에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23일, SNS를 통해 퍼지고 있는 '세월호 구름' 사진.

  

23일 오전 전남 진도군 세월호 인양 현장에서 세월호 선체가 처참한 형태로 수면 위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연합뉴스

'배'와 '물' 하면 떠오르는 사자성어가 있다. 군주민수(君舟民水)다. '임금은 배요 백성은 물이다'는 뜻이다 지난해 말 교수신문이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이기도 하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국회 탄핵소추안이 의결된 당시 분위기가 고스란히 반영됐다. 

군주민수는 '순자'(荀子)에 나오는 말로 원문은 ‘군자주야 서인자수야(君者舟也 庶人者水也), 수즉재주 수즉복주(水則載舟 水則覆舟)’다.

'군주는 배요,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뒤짚어 엎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교수들은 '군주민수'에 이어 하늘을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는 뜻의 역천자망(逆天者亡)을 두 번째 사자성어로 선정했다. 맹자의 역성혁명(易姓革命) 사상과 맞닿아 있다.

'맹자'(孟子) '양혜왕'(梁惠王) 편에 이런 말이 나온다.

제나라 선왕(宣王)이 묻는다. "탕왕(湯王)이 걸(桀)을 내쫓고, 무왕(武王)이 주(紂)를 정벌했다고 하던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맹자가 답한다. "그렇게 전해오고 있습니다."

제 선왕이 다시 묻는다. "신하가 그 임금을 죽인 것이 용서될 수 있습니까?"

걸은 중국 고대 하왕조()의 임금으로 '술로 못을 이루고 고기로 숲을 만든다'는 주지육림(酒池肉林) 고사를 만들어 낸 장본인으로 폭군의 시조처럼 전해지는 왕이다. 탕왕은 그런 걸왕을 죽이고 은 왕조를 세운다.

주는 은나라 임금으로 달기라는 미녀에 빠져 간언하는 충신들을 죽이고 나라를 말아먹은 폭군이다. 무왕은 은나라를 폐하고 새 왕조를 연다.

아무리 폭군이라도 천명을 받은 임금을 신하 된 몸으로 죽인다는 것은 천리에 거스르는 것 아니냐고 제 선왕은 물은 것이다. 이에 맹자는 이렇게 답한다.

"인(仁)을 해치는 사람을 적(賊)이라 하고, 의(義)를 해치는 사람을 잔(殘)이라고 합니다. 잔적(殘賊)을 일삼는 자를 일컫어 일부(一夫)라고 합니다. 일부(一夫) 주(紂)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죽였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천명을 받았지만 스스로 천명을 거슬렀기에 천명을 받은 존재가 아닌 일개 범부로 전락했고, 세상에 해가 되는 범부를 죽인 것이니 이는 천명을 거스른 게 아니고 오히려 새로운 천명을 받은 것이라는 게 맹자 역성혁명의 요체다.

 

역성혁명을 역설한 맹자의 초상.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과 2항이다.

고대 중국에서야 천명을 하늘에서 가져왔지만 법치주의에 기반한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천명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를 명문화한 것이 헌법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그 헌법을 중대하게 위배해 대통령직에서 파면된 것이다.

맹자에 비유하자면 천리를 거슬렀기에 천명을 받은 임금에서 천명을 잃고 일개 범부로 전락한 하 걸왕이나 은 주왕처럼, 박 전 대통령도 헌법을 거슬러 어겨 대통령에서 일개 '자연인'으로 내돌려진 것이다.

도행역시(倒行逆施), 순리를 거슬러 행동한다.

지록위마(指鹿爲馬),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일컫는다.

혼용무도(昏庸無道), 세상이 온통 혼탁하여 어지럽고 어리석고 무도하다, 

군주민수(君舟民水), 임금은 배요 백성은 물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재임 기간인 2013년부터 2016년까지 올해의 사자성어로 꼽힌 말들이다.

이어서 보면, 순리를 거슬러 행동하고 주변에선 사슴을 말이라 하는 모리배들이 횡행하니 세상이 온통 혼탁하고 어지럽다 결국 백성이 군주를 뒤엎었다, 는 얘기다.

그 사이사이 최순실과 정윤회, 김기춘, 조윤선, 안종범, 우병우... 이런 이름을 가진 이들이 겹쳐 보인다. 도행역시 지록위마 혼용무도 군주민수, 이 16자를 박근혜 정권의 지난 4년과 포개 보니 어쩜 저럴 수가 있는지... 

지금 다시 봐도, 돌이켜 보면 더욱더 참으로 소름이 쫙 끼친다.

"민주공화국에서 무조건 존경받아야 하는 군주는 없으며 가만히 있는 착하고 슬픈 백성도 없다." '촛불'과 '탄핵 사태'를 보고 군주민수를 2016년 올해의 사자성어로 추천한 교수의 추천사다. 중앙대 역사학과 교수다. 그런데 그 이름이 또 참으로 공교롭다.

'육 영 수' 다.

'천명'(대선 당선)을 받은 '임금'(대통령)에서 '천리'(헌법)를 거슬러 '역성혁명'(탄핵)을 맞고 일개 '범부'(자연인)로 전락한 박근혜 전 대통령에겐 앞으로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까.

주나라에서 당나라로, 황제에서 황후로 스스로 움켜쥐었던 천명을 다시 돌려놓고 돌아간 측천무후처럼 박 전 대통령이 스스로 겸허히 '하야'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짧게 해본다.

검찰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여부를 금명간 결정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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