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읽는 法과 세상] 양선응 변호사(법률사무소 인선)가 우리사회의 이슈를 책을 통해 성찰하고 그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해 봅니다. 문학과 철학을 공부한 양 변호사는 "글을 통해 법의 대중화, 법의 상식화에 기여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편집자 주

 

양선응 법률사무소 인선 변호사
양선응 법률사무소 인선 변호사

아주 오래된 유죄 / 김수정 지음

김수정 변호사의 '아주 오래된 유죄'는 여성을 위한 법정 변론기이다. 이 책을 읽기 전 그리고 다 읽고 난 후, 나는 책 제목의 의미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유죄인가. 죄가 있다면 그 죄에 대한 형벌은 무엇인가. 이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범죄사실은 '여성으로 태어나서 여성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고, 죄명은 '여성'이며, 처벌은 '죽거나 다치거나 강간이나 폭행을 당하거나 직장에서 해고되거나 자기결정권을 빼앗기거나 살아 있는 동안 평생 고통받는 것'이다.

이 책이 알리고 있는 여성이라는 죄에 대한 처벌의 목록은 길고 두꺼우며, 그 내용은 잔인하고 가혹하다. ⅰ) 몰카 또는 헤어진 전 연인에 의해 찍힌 자신의 얼굴, 신체, 성관계 영상 등이 인터넷 세상을 항구적으로 떠돌게 된다(디지털 성범죄) , ⅱ) 성범죄에 저항하기 위해 방어한 행위로 인하여 오히려 가해자가 되어 처벌된다(혀 절단으로 방어한 성폭력 재심 청구 사건), ⅲ) 아이를 낳고도 무책임하게 양육의 의무를 저버린 남자들의 사진이나 이름을 공개할 경우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하기도 한다(배드파더스 초상권 침해 주장 사건), ⅳ) 아이를 낳을지 말지를 여성이 스스로 결정할 수 없으며, 낙태를 할 경우 여성은 처벌의 위험에 처하나 남성은 낙태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낙태죄 위헌 여부 사건), ⅴ) 직장 내에서 성차별, 성희롱, 성폭력을 당하기도 하며, 그로 인한 우울증으로 자살을 (당)하기도 하는데, 그와 같은 죽음이 업무상 재해로 쉽게 인정되지도 않는다, ⅵ) 제국주의 일본에 의해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되어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기기도 하며(위안부 피해자 손해배상 소송), 국가 주도의 외화벌이 사업에 내몰려 미군 기지촌에서 위안부로 살아가게 되기도 한다(미군 기지촌 위안부 국가배상 소송), ⅶ) 직장 내에서 여성의 노동은 보조적이며 대체가능한 것으로 취급되며(그래서 비정규직 비율이 높고, 경제적 위기 상황에서 쉽게 해고된다), 가정 내에서 여성의 돌봄 노동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법원의 판단은 구체적·개별적 사건에 일반적·추상적인 법률을 적용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리고 법원의 판단은 그 시대의 사회통념과 평균적 보통인의 인식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 않는다. 따라서 여성과 관련된 사건에서 법원의 판단을 살펴보면, 현재 우리사회에서 여성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으며, 여성에 대한 억압과 배제와 차별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대강이나마 알 수 있다. 위에 열거한 사건들 및 여성이 피해자인 다른 사건들을 살펴보면, 우리 사법체계 내에서 여성의 권익 보호는 여전히 미흡하고, 여성에 대한 범죄로 인한 피해 구제는 여전히 부족하다.

물론 여성의 권익을 보호하자는 주장이 구체적인 사건에서 여성의 권익을 무조건적으로 다른 가치에 우선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며, 여성에 대한 범죄로 인한 피해를 구제하기 위해 다른 헌법적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될 것이다. 가령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른 법률 개정은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이라는 두 가치를 조화하기 위한 심사숙고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성범죄 사건에서 성인지 감수성 이론은 무죄 추정의 원칙을 훼손하지 않고 피고인의 방어권 행사를 위축시키지 않는 전제에서 적용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저자의 주장이 때때로 극단적이어서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여성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투쟁의 전선이 남성과 여성 사이에 그어지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의문도 생긴다. 그러나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죄가 되어 사회적으로 온갖 처벌을 받고 있는 현실이 부당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유보 없이 동의할 수밖에 없다.

'아주 오래된 유죄'라는 수사적 표현은 조금의 과장도 없이 우리나라의 여성이 처한 현실을 적확하게 그리고 있다. 물론 변화의 기운이 조금씩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성문제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점차 활발해지고 있고, 사법의 영역에서도 낙태죄 위헌 결정과 같이 작지 않은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은 여전히 공고하고, 여성성에 대한 왜곡과 유린은 더욱 교묘하고 악랄한 방식으로 자행되고 있으며, 페미니즘에 기반한 목소리는 아직은 폭넓은 공감을 얻지는 못하고 있다.

"변화의 시대에 가장 슬픈 비극은 나쁜 사람들의 폭력과 독설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 끼치는 침묵과 무관심입니다. 이제 우리 세대는 악한 자들의 말과 언행뿐만 아니라 선한 자들의 두려움과 무관심도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중)

저자는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좀 더 많은 남자 사람이 이 글을 읽고 여성들의 현실은 여전히 고통에 찬 것임을, 여성의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 한 남자 사람 역시 고통 없는 삶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작은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썼다. 이 책을 펼치는 것이 지금까지의 소름 끼치는 침묵과 무관심에 대한 작은 반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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