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읽는 法과 세상] 양선응 변호사(법률사무소 인선)가 우리사회의 이슈를 책을 통해 성찰하고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해 봅니다. 문학과 철학을 공부한 양 변호사는 "글을 통해 법의 대중화, 법의 상식화에 기여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편집자 주

 

양선응 법률사무소 인선 변호사
양선응 법률사무소 인선 변호사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 / 박이대승 지음

헌법재판소는 2019. 4. 11. 임신한 여성의 자기낙태를 처벌하는 형법 제269조 제1항(이하 ‘자기낙태죄 조항’)과, 의사가 임신한 여성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아 낙태하게 한 경우를 처벌하는 형법 제270조 제1항 중 ‘의사’에 관한 부분(이하 ‘의사낙태죄 조항’)에 대해 각각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여 헌법에 위반된다고 선고하였다(2017헌바127 결정).

자기낙태죄 조항과 의사낙태죄 조항에 대해 헌법 위반이 선고되기는 하였지만, 재판관 3인은 단순위헌 의견을, 재판관 4인은 잠정적용 헌법불합치 의견을 밝힘으로써 헌법재판소의 공식적인 주문은 잠정적용 헌법불합치가 되었다. 이에 따라 각 위헌적 조항은 즉시 효력을 상실하지 않고, 2020. 12. 31.까지는 효력을 유지하게 되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입법자는 2020. 12. 31.까지 개선 입법을 하여야 했지만, 개선 입법이 이루어지지 않아 현재 임신중단(낙태) 행위에 대한 법적 규율은 공백 상태이다.

이 공백은 최종적으로 입법에 의해서 메워지겠지만, 입법자의 손에만 맡겨놓아서는 안 될 너무도 중요한 문제이다.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의 저자 박이대승에 따르면, “임신중단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공동체의 생존을 위한 공통규범을 수립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임신중단에 대한 논의는 태아에게 생명권이 인정되는가(즉 태아는 인간인가), 민주주의 사회체제의 토대가 되는 법은 무엇을 인간으로 규정하는가, 법은 어떤 존재자까지를 인간으로 규정하여 보호하고 나머지는 보호에서 배제하는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생명권이 인정되는 존재의 생명을 합법적으로 박탈하는 것이 도무지 가능한가, 여성의 임신중단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인정하면서도 임신중단을 제한하는 것이 타당한가라는 질문들과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결국 임신중단에 대한 논의가 자명하게 보였던 공통규범들에 대해 질문하고 그 규범의 근본을 재정립하는 작업이 되는 이유다.

그런데 저자가 보기에 우리 사회에서의 임신중단에 관한 논의는 비합리적 찬성 입장과 비합리적 반대 입장이 평행선을 그리며 끝없이 대립하고 있을 뿐, 생산적인 결과물을 산출하지 못하고 있다. 임신중단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고 있던 형법이 사라진 자리에서 다양한 의견이 분출하고는 있지만, 페미니즘/(가부장주의적 도덕 규범에 기반한) 반페미니즘, 계몽주의/종교, 민주주의적 규범/비민주주의적 가치 체계의 대립으로 복잡한 전선이 형성되어 있을 뿐이다.

임신중단 문제에 대한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은 제시되는 주장들의 논리적·개념적 합리성을 확보함으로써 어떤 특정 입장을 선택하기에 앞서 합리적 찬성 입장과 합리적 반대 입장을 수립하는 것이다. 모든 논쟁적인 사회적 문제에 들러붙게 마련인 뜨거운 정념을 배제하고 차가운 이성이 작동하는 합리적인 담론 공간 또는 공론장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저자는 이와 같은 작업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헌법불합치 결정의 논리구조는 다음과 같다. ①임신중단에 대한 권리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포함된다(즉 헌법상 기본권이다). ②태아는 생명권의 주체이다(다만 헌법재판소는 태아를 ‘형성 중의 생명’이라고 할 뿐 인간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국가는 태아의 생명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③실제적 조화의 원칙에 따라 양 기본권(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의 실현을 최적화한다는 차원에서 국가는 결정가능 기간(임신한 여성이 임신중단을 결정하고 실행할 수 있는 기간) 내의 임신중단을 허용할 수 있다. 그런데 자기낙태죄 조항은 결정가능 기간 중에 있는 임신한 여성의 낙태를 예외없이 형사처벌한다는 점에서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것이므로 헌법에 위반된다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헌법재판소 결정의 가장 큰 문제점은 태아를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태아에게 생명권의 주체성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근대 민주주의 원리 하에서 권리는 ‘법적 인간’에게만 귀속된다. 그런데 비인간인 태아가 어떻게 생명권이라는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또 만일 태아에게 생명권이 인정된다면, (결정가능 기간 내라는 시간적 제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낙태를 허용할 수 있는 것인가. 저자는 태아의 생명권은 “인간 여성과 비인간 태아의 법적 지위를 뒤집기 위한 일종의 꼼수” 또는 “여성의 몸에 대한 직접적 통제를 정당화하는 무기”라고 일갈한다.

저자는 “근대 민주주의의 원리를 따르고 태아를 비인간으로 규정한 현행 법질서를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태아의 생명권에 대한 비합리적 태도를 배제하고,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임신중단에 대해 지지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주장의 타당성을 떠나 이 주장이 논리적 정합성을 갖추었음은 분명하다. 반대로 태아를 법적 인간으로 인정한다면(즉 생명권 주체성을 인정한다면), 어떤 경우에도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는 인정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이다.

이제 국회가 입법으로 응답할 시간이다. 헌법불합치 결정이 어쩔 수 없이 입법 과정의 주요 길잡이가 되겠지만, 국회가 그 결정에 내재한 '개념적 오류와 논리적 모순'까지 수용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또 다른 방식으로 여성의 몸에 대한 통제를 정교화하는 내용으로 입법이 이루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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