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인도적 행위, 국가면제 적용 어려워"... 1차 소송, 원고 승소
"국가면제 예외 인정하면 외교 충돌 불가피"... 2차 소송, 각하

[법률방송뉴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을 상대로 국내 법원에 제기한 두 번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사실상 패소했습니다.

원칙은 알되 변통은 모르면 꽉 막혀 고착된다. 오늘 ‘뉴스 사자성어’는 경니권패(經泥權悖) 얘기해 보겠습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5부(민성철 부장판사)는 오늘 오전 고(故) 곽예남·김복동 할머니와 이용수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와 유족 20명이 일본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각하했습니다.

각하란 소송요건을 갖추지 못한 경우 본안 심리 없이 사건을 그대로 종결하는 것을 말합니다.  

재판부는 일본 정부에 이른바 '국가면제'를 적용해야 한다고 보고 각하 판결을 내렸습니다.

‘국가면제’란 주권국가는 다른 나라의 재판 관할권으로부터 면제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 책임부담을 지우는 판결을 내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재판부는 "국가면제의 예외를 인정하면 선고와 강제집행 과정에서 외교적 충돌이 불가피하다"며 각하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 과정에 재판부는 2차 세계대전 후 전범국 독일을 상대로 유럽 여러 국가에서 피해자들이 소송을 냈으나 국가면제를 이유로 각하된 사례 등을 언급했습니다.  

"일본에게 국가면제를 인정하는 것은 헌법 위반이라 볼 수 없다. 국제관습법에 따라 판단할 수밖에 없다. 예외를 창설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재판부는 밝혔습니다.  

재판부는 그러면서 지난 2015년 12월 이뤄진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서 "외교적인 요건을 구비하고 있고 권리구제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합의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은 등 내용과 절차에서 문제가 있지만 이 같은 사정만으로 재량권을 일탈·남용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게 재판부 판단입니다. 

재판부는 "비록 합의안에 대해 피해자들의 동의를 얻지는 않았지만, 피해자의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는 거쳤고 일부 피해자는 화해·치유재단에서 현금을 수령했다"고 덧붙였습니다.

"합의에는 상대방이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입장만 일방적으로 반영할 수 없다"는 게 재판부 판시입니다.   

요약하면 ‘국가면제’라는 국제관습법에 따라 일본에 배상책임을 지울 수 없고, 피해자들의 동의 여부를 떠나 ‘한일 위안부 합의’에 따른 다른 구제수단도 존재한다는 취지의 판결입니다.  

재판부는 다만 선고 말미에 “"피해자들이 많은 고통을 겪었고, 대한민국이 기울인 노력과 성과가 피해자들의 고통과 피해를 회복하는 데는 미흡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위로했습니다.

재판부는 그러면서도 피해 회복 등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은 법원이 아닌 외교적 노력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는 취지로 강조했습니다.

반면 앞서 같은 법원 민사합의34부(김정곤 부장판사)는 지난 1월 8일 고(故) 배춘희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 12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배소송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했습니다.

당시 재판부는 "이 사건은 일본에 의해 계획·조직적으로 광범위하게 자행된 반인도적 행위로 국제 강행규정을 위반한 것"이라며 "국가면제는 적용하기 어렵다“고 판시했습니다.

재판부는 이에 일본에 대한 재판권을 행사해 원고 승소로 판결, 피해자 손을 들어줬습니다. 

국가면제가 인정된다, 인정되지 않는다. 같은 위안부 피해배상에 대한 같은 서울중앙지법의 180도 다른 판결.

중국 당나라 때 문체 개혁운동을 제창한 혁신 정치가 유종원이 당시 형벌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한 ‘단형론’(斷刑論)이라는 저서가 있습니다. 

여기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경비권즉니(經非權則泥) 권비경즉패(權非經則悖). 여기서 경(經)은 원리나 원칙, 권(權)은 변화에 따른 대처, 임시방편 정도의 의미입니다.

진흙을 뜻하는 니(泥)는 수렁에 빠진 듯 옴짝달싹 못하게 되는 걸 말하고, 패(悖)는 어그러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저 10글자를 해석하면, 원칙만 알고 임시변통을 모르면 앞뒤가 꽉 막혀 갇히고, 그때그때 임시변통만 알고 원칙을 벗어나면 도리에서 어긋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원칙과 변통 사이. 동양의 성현 공자의 애제자 가운데 안회(顔回)라는 이가 있습니다.   

어느날 안회가 포목점에 갔는데 포목점 주인이 포목 1개에 8전, 3개면 24전을 지불하라고 했는데 손님이 3개면 23전이라고 바득바득 우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에 안회가 “24전이 맞다”고 하자 손님은 “공자를 찾아가 물어보자”며 자기가 틀리면 목을 내놓고 안회가 틀리면 쓰고 있는 관(冠)을 내놓으라고 합니다.

전말을 들은 공자는 웃으면서 안회에게 “네가 졌으니 이 사람에게 관을 벗어 주라”고 합니다.

관을 벗어주긴 했지만, 억울해하며 왜 그랬는지 묻는 안회에게 공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3X8이 23이라고 하면 너는 관 하나 벗어주면 그만이지만, 3X8이 24라면 그 사람은 목숨을 내놓아야 하지 않느냐. 관이 더 중요하느냐, 사람 목숨이 더 중요하느냐”

‘안회의 깨달음’으로 유명한 고사입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위안부 피해보상 2차 소송 각하 판결이 내려진 오늘,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는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의 ‘춘계 예대제’라고 불리는 제사에 공물을 바쳤습니다.

아베 신조 전 총리는 야스쿠니를 직접 참배했습니다. 

각하 판결을 받아든 이용수 할머니는 울먹이며 “너무 황당하다”고 말했습니다. 

사건 대리인 이상희 변호사는 “법원의 역할이 무엇인지 이번 판결을 통해 국제질서 속에서 인권 보장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같이 논의해야 하는 시기”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행정부가 제대로 청구권 협정을 해 피해자들의 권리를 구제했거나 아니면 외교부가 알아서 이 문제를 해결했으면 법원에 왜 오겠냐“는 게 이상희 변호사의 말입니다.

같은 위안부 피해자의 일본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에 대한 우리 법원의 180도 다른 판결. 

영화 대사로 유명해졌는데 “뭣이 중한디”라는 말이 어쩔 수 없이 떠오릅니다. 

‘법리’라는 것과 이에 대한 판사의 해석과 판단, 위안부 할머니들의 회한과 바람, 요원해 보이기만 하는 일본의 사죄와 반성, 한일 위안부 합의, 손해배상 소송, 승소와 각하... 정말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판결인 것 같습니다. '뉴스 사자성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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