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를 속인 미국 대선 여론조사 "우리가 분명히 틀렸다" 반성문 낸 미국여론조사연합회 "힐러리 98% 당선"... 정치적 의도가 '여론'을 오도했다

여론조사가 여론을 제대로 반영하기는커녕 여론을 오도하는 거짓말로 전락하고 있다. 미국 대선, 브렉시트, 한국 총선에서 여론조사는 실패를 거듭했다. 거짓 여론조사로 사법처리를 당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한국 대선을 앞두고 쏟아질 여론조사의 함정과 문제점에 대한 우려도 크다.

"우리가 이번에는 분명히 틀렸다."

퓨리서치센터, 마리스트칼리지와 유고브, 서베이몽키 등 여론조사기관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미국여론조사연합회(AAPOR)는 미국 대선 다음날인 지난달 9일 '2016 대선 여론조사 검증'이라는 보도자료를 발표하고 미국의 여론조사기관들이 2016년 대선 여론조사에서 완전히 엉터리였다고 실토했다.

이 문건은 다른 건 몰라도 미국의 여론조사는 그래도 정확할 것이라는 믿음을 주었던, 여론조사의 마지막 보루로 여겨졌던 미국의 여론조사기관들이 실패를 자인한 사실상의 '반성문'이었다.

미국여론조사연합회(AAPOR)가 지난 11월 9일 "우리가 분명히 틀렸다"면서 2016 미국 대선 여론조사의 오류를 인정하고 발표한 보도자료. / AAPOR 홈페이지 캡처

미국의 여론조사기관들이 대선 당선자 예측에 실패한 것은 1948년 토마스 듀이 공화당 후보와 해리 트루먼 민주당 후보의 대선 당시, 갤럽 등 여론조사기관들이 듀이 후보의 승리를 예측했다가 빗나간 이후 68년 만의 일이었다.

갤럽은 당시 선거일 3주 전에 진행한 최종 여론조사에서 부동층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것을 실패 요인으로 꼽았다. 최종 여론조사에서 반영하지 않았던 부동층 중 4분의 3이 트루먼을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미국 대선 기간 동안 미국의 여론조사업체와 언론매체들은 시종일관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의 승리를 점쳤다.

뉴욕타임스는 선거 하루 전날까지 클린턴의 승리 가능성을 84%로 예측했다. 프린스턴 선거 컨소시엄과 허핑턴포스트는 클린턴의 승리 가능성을 98%까지 내다봤다.

워싱턴포스트, ABC, CNN 등 대다수 주요 매체들이 클린턴의 승리를 확실시했다.

하지만 이런 예측과 달리 트럼프가 306명의 선거인단수를 확보해 232명에 그친 클린턴에게 큰 차이로 승리하면서, 여론조사기관들은 물론 미국의 주요 언론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 영국 브렉시트, 한국 4·13총선 여론조사도 빗나가

미국 대선 뿐만이 아니다. 지난 6월 치러진 브렉시트(Brexit) 찬반 영국 국민투표도 여론조사의 예측이 빗나간 대표적인 사례다.

투표 당일인 6월 23일(현지시간) 여론조사기관 유고브가 투표자 4천8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EU 잔류가 52%, 탈퇴가 48%로 나타났다고 현지 언론이 보도했다. 또 다른 조사기관인 입소스모리도 54% 대 46%로 영국의 EU 잔류 쪽에 무게를 실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예측을 뒤엎고 EU탈퇴 찬성 51.89%, 반대는 48.11%로 집계됐다고 영국 선거관리위원회가 발표했다.

한국에서도 여론조사 예측과 정반대로 결과가 나온 사례가 있다.

지난 4월 치러진 20대 총선에서 한국의 여론조사기관들은 여당의 압도적인 승리를 예측했다. 하지만 결과는 여소야대, 야당이 의석 과반을 차지했다.

이처럼 여론조사의 실패는 지역과 시기를 가리지 않는 현상이 됐다. 오죽하면 '여론조사 종말론'까지 등장했다.

 

■ 여론조사가 포착하지 못하는 유권자들의 속마음

미국 대선과 브렉시트, 4·13총선 여론조사의 실패는 공통된 이유를 갖고 있다. 바로 유권자들의 숨은 표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트럼프를 속마음으로는 지지하지만 공개적으로는 지지 의사를 밝히지 않는 이른바 '샤이 트럼프’(Shy Trump) 현상은 미국 대선 여론조사 실패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정치적 올바름’을 강조해온 미국사회에서 인종차별적 발언과 여성·무슬림 비하, 음담패설 등을 서슴없이 내뱉은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는 샤이 트럼프 유권자들이 여론조사 과정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들이 2016 미국 대선 유세 현장에서 트럼프의 연설에 환호를 보내고 있다. /연합뉴스

중앙선관위 여론조사공정심의위원회 이종호(52) 사무국장은 "미국 대선 여론조사 과정에서 '샤이 트럼프' 지지자들을 제대로 조사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실패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사무국장은 “또 트럼프의 핵심 지지층인 저소득, 저학력 백인 지지층의 투표율을 제대로 산정하지 못한 부분도 이번 미국 대선 여론조사 예측의 실패 원인 중 하나"라고 말했다.

<여론조사의 비밀>의 저자 유우종(45)씨는 "여론조사 대상과 실제 투표장을 찾은 사람들의 차이에서 이번 미국 대선의 결과가 발생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유씨의 말대로 실제 미국 여론조사기관들은 제조업 사양화로 쇠락한 중서부와 북동부의 공업지대 ‘러스트 벨트’(rust belt)의 노동자층의 투표 가능성을 낮게 잡았다. 하지만 러스트 벨트의 저학력, 저소득 백인 노동자들은 막상 투표 당일 대거 투표장을 찾았고, 트럼프는 결국 위스콘신, 미시건,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에서 승리함으로써 승기를 굳혔다.

미국의 기성 정치와 불법이민 정책에 대해 불만을 표출한 이른바 '앵그리 화이트’라 불리는 백인 남성들의 분노를 읽지 못한 것이 여론조사 실패의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다다.

CNN 출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들 백인 남성들로부터 트럼프가 63%의 지지를 얻은 반면, 클린턴은 31%에 그쳤다.

브렉시트 당시에도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지지하지만 이를 선뜻 밖으로 표출하지 못한 보수당 지지자들을 가리키는 '샤이 토리'(shy tory) 현상이 나타났다.

한국의 경우에도 20, 30대 유권자들의 표심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4·13총선의 사례가 기존 여론조사 방식의 한계를 뚜렷이 드러낸다.

 

■ 트럼프 우세 점친 LA타임스-USC, IBD-TIPP의 조사방식

하지만 미국 대선에서 절대다수의 여론조사기관들이 클린턴의 당선을 예측했을 때도 줄기차게 트럼프의 우세를 점친 곳이 있었다.

LA타임스-USC(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와 IBD(Investor’s Business Daily)-TIPP(TechnoMetrica Market Intelligence)가 바로 그들이다.

LA타임스-USC는 선거 당일 트럼프와 클린턴의 당선 가능성을 각각 46.8%, 43.6%로 예측했다. IBD-TIPP는 45% 대 43%로 트럼프 우위를 예상했다.

미국의 거의 모든 여론조사기관과 주요 언론매체가 45대 대통령은 힐러리라고 했을 때, 이들이 당당히 트럼프라고 외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CNN은 이번 미국 대선에서 신뢰도에 치명상을 입은 대표적인 매체다. CNN은 선거기간 내내, 선거 당일에도 힐러리를 ‘밀어주는’ 식의 보도와 우세 예측을 했다가 트럼프의 승리로 체면을 구겼다. CNN이 선거 당일 보도한 후보별 선거인단 확보 현황. /CNN 홈페이지 캡처

기본적으로 이 두 곳은 기존의 여론조사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LA타임스-USC는 자체 개발한 ‘데이브레이크’(DayBreak)라는 방식을 통해 여론조사를 진행했다.

데이브레이크 방식은 매번 응답자를 무작위로 추출하는 기존의 조사 방식이 아니라, USC가 진행한 프로젝트에 꾸준히 참여했던 3천200명을 패널로 정하고, 그 중 450명을 대상으로 매일 지지 후보에 대해 100점을 기준으로 호오를 답하도록 했다.

이 방식은 2012년 오바마 대통령의 재선 당시 예측에서도 적중했다. 데이브레이크 방식은 정치적 사건에 대한 인간의 ‘심리 변화’를 반영, 보다 세밀한 예측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IBD-TIPP도 그들만의 조사 방식을 사용했다. 보통 여론조사기관은 유권자를 대상으로 인구통계학적 기준에 따라 응답자를 고르지만 IBD-TIPP는 투표할 의사가 있는 유권자만을 ‘유효한 유권자’ 층으로 한정짓는 조사 방식을 사용했다.

다음소프트 최재원(45) 이사는 "SNS상에서 투표를 하겠다는 의향을 보인 사람들을 중심으로 조사한 방식이 투표 결과와 맞아 떨어져 IBD의 예측이 정확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최 이사는 그러나 "SNS상에서 투표를 하겠다는 의사 표시의 한계는 연령대별·지역별 대표성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라며 “어느 정도의 의사 표시를 투표할 의사로 봐야 할지의 문제 등 이 방식도 더 다듬어나갈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기존의 여론조사라는 것이 더 이상 유권자의 표심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단지 조사방식의 문제만은 아니다. 객관적 ‘수치’라는 허울 아래 여론조사를 정치적 의도와 잣대에 따라 이용하려는 세력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더 큰 문제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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