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방송뉴스]

1933년 1월 독일에서 집권에 성공한 후 호시탐탐 오스트리아를 노리고 있던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의 나치 추종세력을 지원하기 시작한다. 1938년 3월10일이 되자 히틀러는 당시 오스트리아 수상이었던 쿠르트 슈스닉(Kurt Schuschnigg)에게 물러날 것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고, 다음 날인 3월11일에는 압박수위를 높여서 대통령 미클라스(Miklas)와 수상 슈스닉에게 물러날 것을 종용한다. 결국 그날 밤 슈스닉이 사퇴하고 나치의 앞잡이인 자이스 잉크바르트(Seyss-Inquart)가 오스트리아의 수상으로 취임하자, 독일은 3월12일 기다렸다는 듯 오스트리아에 군대를 진입시켰고, 3월13일 하루만에 오스트리아를 병합해버린다. 3월15일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왕궁이 있던 빈 영웅광장(Heldenplatz)를 가득 채운 오스트리아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속전속결로 진행된 오스트리아의 합병과정에서 국제사회는 별다른 반대를 표시한 바 없었다. 오직 멕시코 만이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에 반대하였을 뿐이었다.

1950년 10월 중국이 티베트를 침공하였을 때에도 상황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중국 공산정권은 ‘중국이 종주국이며 티베트는 종속국’이라는 주장을 펴면서 완전한 독립을 선포한 티베트를 침공했다. 당시 중국이 티베트를 무장으로 점령한 것은 허용될 수 없는 침략행위임이 명백했지만, 이를 주장하는 티베트의 편을 들어준 것은 엘살바도르밖에 없었다. 물론 미 국무부가 ‘중국은 티베트에 대해 어떠한 종주권도 갖지 않으며, 가진 적도 없다’라는 의견을 표명하기는 하였으나, 국제연합에서는 엘살바도르를 제외하고 어떤 국가도 나서지 않았다. 자국의 이해에 대한 우려가 더 컸던 다른 나라들은 중국의 티베트 침략을 총회에 상정하려는 엘살바도르에 힘을 실어주지 않았다. 티베트를 침공해서 점령하는데 성공한 중국은 이에 자신감을 얻어 한국전쟁이 진행중이던 한반도에도 인민해방군을 파병한다.

오스트리아를 합병해버린 독일이나 티베트를 침공한 중국에 대해서 반대했던 멕시코와 엘살바도르가 자신들의 반대가 별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임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설령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이나 국제연합(United Nations)에서 다수의 국가가 독일과 중국의 무력행사를 규탄하는 결의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독일에 병합되어 버린 오스트리아가 다시 독립국의 지위를 회복하거나 티베트에서 중국인민해방군이 스스로 물러가는 일이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멕시코와 엘살바도르의 반대가 전혀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스트리아와 티베트에서는 모두가 침묵하고 있을 때 자신들을 위해 나서서 맞서준 멕시코와 엘살바도르의 지지와 연대를 기억하고 있고, 국제사회에서 여론을 주도하는 사람들 또한 멕시코와 엘살바도르가 보여준 용기를 잊지 않았다. 설득력과 용기를 갖춘 의견이 실제로 국제여론의 흐름을 바꾸어내거나 구체적인 결과물로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하더라도, 용기를 갖춘 설득력 있는 의견은 냉혹한 국제사회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기 마련이다. 국제사회에서는 어떤 국가의 국민총생산과 같은 경제적 성과뿐만 아니라 실제로 얼마나 시의적절한 의견을 내고 있는지에 따라 해당 국가가 내놓은 의견의 무게를 달리 평가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필자 또한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멕시코나 엘살바도르의 입장에 대해서는 절대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최대한 협조한다는 혼자만의 원칙을 갖고 있을 정도였다.

이제 우리나라도 국제사회에서 다른 국가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용기있는 발언을 할 필요가 있다. 특히 우리가 필요로 할 때 다른 국가들이 용기를 내어 우리의 편을 들어 줄 것을 기대한다면, 우리 또한 그들을 위하여 용기와 설득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끔 용기 있는 의견을 내놓는 습관을 들이지 않고서는 정작 필요할 때에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 또한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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