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방송뉴스]

‘나 살찐 것 같아?’라는 여자친구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를 설명해주는 유튜브 동영상은 넘쳐나지만, 제대로 된 정답을 알려주는 동영상은 찾기 어렵다.

① ‘그래, 살쪘다’ ② ‘아니다, 안쪘다’ ③ ‘모르겠다’ ④ ‘아니, 살 빠진 것 같은데’와 같이 흔히 생각할 수 있는 답변은 모두 정답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살찐 여자친구에게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여자친구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는, ‘진실이 아님을 모두가 알고 있는’ 정답을 찾으려는 노력은 오히려 갈등을 초래하거나 위험한 상황으로 이끌게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음 속 본심을 100% 내비치지 않고 상대방의 기분이나 입장을 배려해주는 것을 우리는 ‘예의’라고 배웠다.

그런데 예의 바른 사람이 하는 말은 본심과 표현 사이의 간극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상대방의 기분을 배려해주는 예의바른 사람일수록 실제로 무슨 생각과 의도로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다.

모호하고 흐릿한 ‘양반의 화법’을 구사하는 계약 당사자와 오랜 시간 협상 한 끝에 ‘상황을 보자’는 말을 들었다면, 상대방으로서는 그 말이 ① ‘상황이 나아지면 제시한 조건 대로 계약을 체결하겠다’ ② ‘제시한 조건으로는 계약을 체결할 수 없다’ ③ ‘보류하겠다’는 것인지를 분명히 알기 어렵다. 이 때문에 ‘양반의 화법’을 구사하는 사람과 복잡한 법률적 협의를 하는 것은 상당한 고통과 좌절이 따를 수밖에 없다. (또한 적지 않은 경우 분쟁이 발생하는 것 또한 필연적이다)

이러한 문제는 국제사회에서도 예외가 없다. 과거 유럽을 지배하던 이탈리아, 스페인과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양반의 화법’을 구사한다. 그들은 본심을 숨기고 정중하면서도 예의바른 표현을 하는 것에 너무나 익숙하다. 그런데 ‘양반의 화법’을 구사할 줄 아는 외교관들은 진지하게 형식을 갖춰 자신의 발언을 시작하지만, 들어보면 장황한 부연설명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은 회의에 처음 참석한 외교관을 환영하거나 본국으로 귀국하는 외교관들에게 감사함을 표시하거나 회의를 주재하고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는 장황한 발언을 마치고 나서야 자신들이 준비해온 본론을 이야기한다.

특히 그들이 애써 선택한 예의바른 단어들로 구성된 본론은 중요한 것일수록 모두가 지쳐 쓰러질 때가 되거나 또는 식사시간 직전에 나오는 법이 많다. 왜냐하면, 그전까지 컨센서스가 형성된 것으로 보였던 결의안에 대해 모두가 방심하고 있을 때 갑자기 반대의사를 밝혀야 발언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업무협의를 위한 미팅에서도 신변잡기에 관한 이야기로 두세 시간을 흘려보내고 헤어지기 직전에야 본론을 이야기하는 것도 전혀 어색해하지 않는다. 그들의 산만하고도 번잡한 화법은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을 밝힐 수 있는 기회를 최소화한다는 이점이 있다.

반면, 과거 상인의 후예들인 영국, 네덜란드나 미국의 외교관들은 전통적으로 ‘상놈의 화법’을 구사한다. 본론을 가장 먼저 이야기하고, 정확하게 자신이 원하는 숫자를 밝힌다. 업무협의를 위한 미팅에서는 악수를 하고 착석한 다음에 바로 미팅의 목적을 이야기하고, 신변잡기에 관한 이야기는 본론에 대한 협의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말을 지키려고 하고 자신이 대표하는 국가 뿐만 아니라 자신의 발언 자체가 갖는 신뢰성 또한 대단히 중시한다. 하지만 그들의 본심과 표현 사이의 간극이 없기에 그들의 솔직함은 예의나 배려심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불편함을 주는 경우도 없지 않다. 다시 말해서, 그들에게는 ‘나 살찐 것 같아?’라는 질문에 대해 ‘그래, 살쪘다’고만 답한 뿐이고, 굳이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진실이 아님을 모두가 알지만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해주는’ 답을 애써 찾지는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 나라의 외교관들은 양반의 화법과 상놈의 화법 사이의 중간 쯤, 조금만 예의를 차리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대한민국 또한 대체로 이런 화법을 구사하거나, 아니면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침묵전략을 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도통 믿을 수 없는 화법을 구사하는 일부 공산권 국가들의 외교관들도 있다. 그들의 신분이 정보기관 요원과 구별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들의 화법에는 ‘밀정의 화법’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네덜란드에 부임한 초기에는 먼저 본론을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상놈의 화법’을 구사하는 외교관들을 무척 좋아했다. 특히 필자가 법원에서 여러 사건들의 모호하고 알 수 없는 표현으로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터라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외교관이라면 상대방이나 상황에 따라 화법을 달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대한민국이 주도적으로 회의를 이끌어가야 하는 상황이거나, 아니면 곤란한 이슈를 잘 수습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정중하고 예의바른 ‘양반의 화법’으로 상대방의 반대를 누그러뜨릴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업무적으로 필요하면 ‘상놈의 화법’을 구사하여 효율적으로 업무를 진행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필자가 상대방이나 상황에 따라 ‘양반의 화법’과 ‘상놈의 화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필자는 아직도 ‘나 살찐 것 같아?’라는 아내의 질문에 처음에는 모른 척하다가 결국 ‘그래, 살쪘다’는 진실 만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드는 '양반의 화법'을 구사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살찐 사람이 자신이 살쪘는지를 물어본 후, 훈훈한 대답을 듣기를 바라는 것이 진정한 문제라는 생각을 끝내 버리지 못하는 것이 필자의 화법에 예의가 부족한 근본원인일지도 모른다)

모성준 판사(대전고등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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